Andrew's Travel Notes.. 인생은 짧고 미국은 넓다 ( 씨저스펠리스호텔 )- 1편
로마의 무소불휘 관력자 씨저를 테마로 잡은 씨저스펠리스호텔

모하비 사막바다 한가운데 호화찬란한 사막섬 라스베가스.
이 사막섬에는 약 300여개의 호텔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면적당 대비 전 세계 도시 중에서 이렇게 수많은 호텔들이 그것도 초대형 호텔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서울 장안의 오성급 호텔 전부 다 합쳐야 라스베가스 호텔 한 두개 개 정도 규모다.
특히나 스트립거리의 초대형 호텔들은 전부 각자 나름대로의 테마를 지니고 있어 더욱 더 이색적이다.
예를 들어 4400개의 룸을 보유하고 있는 럭소호텔은 건물 자체가 이집트의 피라미드형이다. 거대한 스핑크스와 고대 이집트 왕조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새워진 오벨리스크 기념비가 호텔 바로 앞에 위치한 트렘역 앞에서 반겨준다. 그야말로 고대 이집트를 테마로 잡은 호텔이다.
뉴욕뉴욕호텔은 말 그대로 건물 자체 외양이 엠파이어 빌딩에 크라이슬러 빌딩 등 맨하탄 건물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거기다가 호텔 앞에는 브루클린 다리에 자유의 여신상까지 있으니 뉴욕 맨하탄 명소들을 다 옮겨다 놓은 셈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호텔들이 특유의 이미지 테마를 가지고 외관부터 현란한 개성을 자랑한다.
스트립의 자존심 시저쓰펠리스호텔은 1966년에 오픈한 후, 그동안 증측에 증축을 해서 실내에 무려 타워만 6개나 있다. 타워 자체가 하나의 호텔일 정도로 그 규모 또한 대단하다.
그 실내 타워 이름도 모두 고대 로마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옆에 벨라지오호텔의 분수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초대 로마 황제 이름을 딴 아우구스투스 타워, 가장 최근에 완성된 옥타비우스 타워, 쥴리어스 타워, 펠리스 타워 등등이다.
그 중에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일본 요리사 노부(Nobu)를 기리기 위해 만든 노부호텔 마저 있다. 특히나 노부호텔은 방안 인테리어부터 일본식으로 되어있어 욕조 안에 샤워부스에 사우나 의자까지 준비되어 있다.
프런트 데스트도 2층에 따로 있어 호텔 체크인시 정문 앞에 있는 메인 프런트 데스크로 가면 안된다. 그래서 처음 투숙하는 방문객은 자신이 묵고있는 타워의 동선을 잘 기억해야지 까딱 잘못 하다가는 길을 잃어 버릴 수 있다. 실내 규모가 워낙 커서 어디가 어딘지 동서남북 조차 헷갈린다.
그러나 이런 씨저스펠리스호텔은 한국민들에게 지금까지도 마음 아픈 추억을 품고 있다.
지금부터 42년 전, 1982년 11월13일 권투경기 비극이 바로 이 호텔 야외특설링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권투 시합했던 장소는 플라멩고 길가 옆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는 두 동의 고대 로마풍 건물 즉 아우구스트스 타워와 옥타비우스 타워 바로 그 자리다.
당시에는 두 동의 타워가 만들어지기 전이어서 당시 인기 만점이었던 복싱 경기는 주로 그곳 야외 특설 링에서 열렸다. 당시 상대방은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의 세계 챔피언 레이 붐붐 멘시니였고 심판은 흑인 리차드 그린이었다.
1955년 전북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강원도 속초로 이사와 어린 시절 보냈던 김득구 선수는 이복형제들과의 불화로 서울로 홀로 상경한다. 챔피언이라는 인생역전을 꿈꾸면서 시작한 권투는 당시 한국에서 인기 절정의 스포츠였고 챔피언이 된다는 것은 인생 로또나 마찬가지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많은 헝그리 복서들이 저 높은 꿈을 이루기 위해 젊음을 아낌없이 권투에 쏫았다. 당시 김득구 선수가 도전한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 벨트는 한국 복싱 역사상 두번째 도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 했듯이 그 운명의 날 죽을 힘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그가 출국 전 공항에서 기자들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던진 말은 ‘경기장 씨저스펠리스호텔에 관 하나 준비했다.’ 였다. 그렇게 그는 비장의 각오로 태평양을 넘은 것이다.
이런 그의 경기 모습을 못 보고 자라난 시대의 젊은이들도 훗날 영화 등을 통해 그 시대의 다른 유명 권투선수들은 기억 못해도 김득구 선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예상 보다 많다.
안타깝게도 14라운드에서 그는 차가운 링 위로 쓸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가 링 줄 잡고 마지막 사력 다해 일어나려는 불굴의 투지가 그대로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우리 국민은 당시 그 장면을 여과없이 보면서 모두가 경악했다.
지금까지도 그 모습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였고 며칠 후 그의 사망 뉴스를 접했을 때 온 국민은 또 한번 슬픔에 빠졌다. 비운의 복서 김득구 선수는 분통하게 그렇게 씨저스펠리스호텔에서 그의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경기 후 충격스런 일은 계속 이어진다. 당시 경기 심판 보던 오하이오주 출신 흑인 리차드 그린도 7개월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김득구의 어머니 역시 긴급하게 비자를 받아 4일간이나 뇌사상태로 있던 라스베가스 플라맹고길과 이스턴길의 Desert Springs Hospital 방문해서 생명 연장장치 제거에 동의한다. 미국에서는 친부모 동의없이는 제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챔피온이 되어 가난을 이겨내고 인간승리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불꽃 같은 삶을 아낌없이 그대로 쏫아 부은 김득구 선수는 그렇게 우리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도 머나먼 라스베가스 플라멩고 길의 병상에서.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어머니가 한국으로 귀국 후, 가난이란 멍우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자신이었고 그 이유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비관 끝에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또한 챔피언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게 된 멘시니 역시 김득구 와의 경기 후 다음 경기에서부터 졸전을 면치 못하다가 그만 패하면서 조기 은퇴를 선언한다. 맨시니는 당시 미국에서 연예인 같은 수려한 외모에 쉬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저돌적 공격형 복서로 인기가 최고조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 역시 그 날 경기 이후 비운의 복서가 되면서 결국 잊혀져간 복서가 되었다.
암튼 정확히 40년 전 씨저스펠리스호텔에서 일어난 비극적 경기를 기억하고 있는 중년 이상의 한국민들은 잘 싸우고도 막판에 쓰러진 김득구 선수에 대한 한을 지금도 서로가 짊어지고 있는 줄도 모른다.
2012년 김득구 선수 사망 30주기를 맞아 미국의 베스트셀러 전기 작가 마크 크리걸이 발간한 ‘멘시니의 일생’ 에서 그는 이리 언급한다. 씨저스펠리스호텔의 그날 경기는 공교롭게 두 선수 모두의 삶이었던 권투란 운동을 불행스럽게 마감하는 불운의 날이었다고.
(다음 2부 계속)
Andrew Kim은 여행 및 사진작가로서 미국 전 지역에서 활동 중이며, 라스베가스 투어메이트에서 여행상담과 가이드도 한다. 대표 저서로는 ‘인생은 짧고 미국은 넓다’ ‘Andrew’s Travel Notes’ 등이 있다. (투어문의 : 미국 714.625-5957, 한국 010-5380-3411 / Email : USATOUR@YAHOO.COM / 카톡 ID : USA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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